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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운행을 멈춰뒀던 에스컬레이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휴지 상태로 1년 넘게 두다 보니 이번에는 다른 방향의 민원이 들어왔습니다. "어차피 안 쓰는데 자리만 차지하니 차라리 철거하고 그 공간을 다른 용도로 쓰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일부는 그 자리에 수납공간이나 휴게공간을 만들자고 했고, 일부는 안전을 위해 아예 막아버리자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부터 속도를 늦췄습니다. 휴지는 운행을 멈추고 안전조치만 해두면 되는 비교적 단순한 절차였지만, 철거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휴지는 시설을 그대로 둔 채 사용만 중단하는 것이라 원상회복이 쉽지만, 철거는 건축물의 구조와 외관을 실제로 바꾸는 행위입니다. 실제로 다른 건물에서 관할관청 허가 없이 에스컬레이터를 철거하고 방화셔터까지 제거해 운동시설로 용도를 바꿨다가, 무허가 대수선 및 용도변경으로 벌금형을 받은 사례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습니다.

관리단총회 의결만으로는 안 된다 — 건축법까지 함께 봐야 하는 이유
가장 먼저 짚은 것은 의결 정족수였습니다. 휴지를 결정할 때는 통상적인 관리 행위로 보고 일반 결의로 처리했지만, 철거는 공용부분의 외관과 구조를 실질적으로 바꾸는 행위이므로 집합건물의 소유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15조에 따른 '공용부분의 변경'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구분소유자 및 의결권의 각 4분의 3 이상이라는 가중된 정족수가 필요합니다. 단순 관리(제16조)와 변경(제15조)을 구분하는 기준은 외관·구조·용도가 실질적으로 달라지는지인데, 철거는 명백히 이 기준에 해당했습니다. 또한 철거로 인해 특정 층이나 특정 구분소유자의 접근성에 유독 큰 영향을 준다면 그 구분소유자의 개별 승낙까지 받아야 한다는 점도 확인했습니다. 다행히 저희 건물은 전 층에 동일하게 영향을 주는 사안이어서 개별 승낙 문제는 크지 않았습니다.
총회 의결을 준비하면서는 단순히 "철거하겠습니다"라고만 안건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① 철거 후 공간 활용 계획,
② 구조 안전성 검토 결과(건축사 또는 구조기술사 의견),
③ 예상 공사비와 부담 방식,
④ 인허가 절차에 걸리는 예상 기간을 함께 자료로 만들어 배포했습니다.
정족수가 높아진 만큼 설명회도 두 차례 더 열어 충분히 의견을 수렴했고, 최종적으로 가중 정족수를 채워 의결을 받았습니다.
실제 진행한 절차 — 인허가, 공단 말소, 공사까지
총회 의결 후에는 건축사사무소와 함께 철거 공사가 건축법상 어떤 절차에 해당하는지부터 확인했습니다.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된 개구부를 막고 바닥을 새로 시공하는 작업은 단순 인테리어 공사가 아니라 건축법상 대수선에 해당할 가능성이 컸고, 실제로 구조검토 결과 슬래브 보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와 관할 구청에 대수선 허가(또는 신고) 절차를 밟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방시설 변경 여부도 함께 검토했는데, 에스컬레이터 주변 방화셔터나 제연설비에 영향이 없는지 소방서와도 사전 협의했습니다. 인허가가 늦어지면 공사 일정 전체가 밀리기 때문에, 총회 의결 직후 바로 설계 단계부터 인허가 협의를 동시에 진행한 것이 시간을 아끼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행정 절차와 별도로 승강기 쪽 절차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기존에 휴지 신고만 해둔 상태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한국승강기안전공단에 철거 사실을 통보하고 승강기 등록 자체를 말소하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등록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물리적으로 철거만 진행하면 향후 자체점검·안전검사 의무가 행정상 계속 남아 있는 것처럼 처리될 수 있어, 이 신고를 누락하지 않는 게 중요했습니다. 실제 해체 공사는 승강기 유지관리업체와 별도 철거 전문업체가 함께 들어와 진행했고, 해체된 부품과 구조물은 산업폐기물 처리 규정에 따라 분리·반출했습니다. 공사가 끝난 뒤에는 건축물대장상 변경된 시설 현황을 반영하기 위해 건축물현황 변경 신고도 함께 마무리했습니다.
정리하며 — 법률 근거와 실무에서 놓치기 쉬운 부분
이 일을 마치고 법적 근거를 다시 정리해봤습니다. 첫째, 에스컬레이터 철거는 집합건물법 제15조의 공용부분 변경에 해당하므로 구분소유자 및 의결권 각 4분의 3 이상의 결의가 필요하며, 이는 관리규약으로도 낮출 수 없는 강행규정입니다. 단순 관리 사항으로 오해해 일반 결의만으로 진행하면 추후 일부 구분소유자가 무효를 주장하며 원상복구를 청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족수를 잘못 산정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실수입니다. 둘째, 철거에 따른 구조 변경은 건축법상 대수선·용도변경 절차의 적용을 받을 수 있어 관할관청의 허가나 신고 없이 임의로 진행하면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무허가로 에스컬레이터를 철거하고 용도를 변경해 벌금이 부과된 사례가 있었던 만큼, 행정 절차를 건너뛰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셋째, 승강기 안전관리법상 등록된 승강기를 철거할 경우에는 한국승강기안전공단에 철거 사실을 통보하고 등록을 말소해야 하며, 이를 누락하면 더 이상 운행하지 않는 시설에 대해서도 행정상 의무가 남아 있는 것처럼 처리될 수 있습니다.
실무적으로는 다음 순서를 체크리스트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① 휴지와 철거를 명확히 구분하고, 철거는 공용부분 변경(가중 정족수)으로 접근하기
② 구조 안전성 검토와 인허가 가능성을 총회 의결 전에 먼저 확인해 자료로 공유하기
③ 관할관청의 대수선·용도변경 허가(신고)와 소방 협의를 공사 착공 전에 마무리하기
④ 한국승강기안전공단에 철거 통보 및 등록 말소를 빠뜨리지 않기
⑤ 공사 완료 후 건축물대장 변경 신고까지 마쳐 행정 기록과 실제 현황을 일치시키기
휴지는 '잠깐 세워두는 것'이지만 철거는 '되돌릴 수 없는 변경'입니다. 이 차이를 처음부터 분명히 인식하고 절차를 밟느냐에 따라, 나중에 일부 구분소유자의 이의제기나 행정처분 위험에 노출되는지가 갈린다는 것을 이번 일로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